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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8.25 [펌]한 시대가 끝났다.
-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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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故 노무현 前 대통령, 그리고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까지. 2009년은 한국 현대사 연보에 제법 비중있게 기록될 것이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단상은 아마도 저마다 다르겠지만 2009년의 오늘을 비통하게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써, 후일에 2009년을 기억할 때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음을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감히 이렇게 나름의 감상을 끄적거리려 한다.
“한 시대가 끝났다”고-
정확하게 30년 전 1979년 10월 26일, 한 사내가 총에 맞았다. 자신의 충실한 심복이라 믿었던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에게서 권총으로 피격당한 박정희 前 대통령은 결국 숨을 거두었고,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9사단장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정당 계보사적으로 접근하자면 박정희의 집권여당이던 민주공화당(공화당)이 4공 실세였던 김종필을 중심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다수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으로 흡수되어 권력의 무게중심이 민정당으로 이동하던 시기였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길지만 간추리고 간추려 말해보자면, 어이없게도 ‘서울의 봄’ 87년 6월 후에 ‘보통사람’을 외치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더 어이없게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전두환-노태우의 민정당, 그리고 박정희-김종필의 공화당과 손을 잡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탄생시키고 평화민주당(평민당)의 김대중을 고립시켰다. 그 유명한 ‘3당 합당’이었다. 3당 합당을 선언하는 김영삼의 기자회견에서 울부짖으며 “이의있습니다!”를 외치던 사람은 15년 뒤에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지만 당시에는 젊은 국회의원에 불과했다. 공화계-민정계를 끌어안고 집권하게된 김영삼의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칭하고 신한국당은 후에 이회창에 의해 ‘한나라당’으로 당명이 바뀌게 된다. 97년 IMF사태에 이은 대선에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가 승리함에 따라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3당 야합을 규탄하며 울부짖던 국회의원 노무현은 5년 뒤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 그러나 다음 대선에서 참패하여 10년 만에 한나라당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었다. 간추리고 간추려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30년이었다.
이 30년의 시기는 그 명칭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박정희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박정희가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지난 30년간 정권교체를 포함하여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했던 지배논리가 결국은 ‘박정희식인가, 反박정희식인가’로 환원해서 생각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30년 동안 대한민국은 ‘독재’와 ‘민주주의’가 대립했고, ‘반공’(메카시즘이라 할지라도)과 ‘좌파’가 대립한 시대였으며, ‘친일’과 ‘규명’이 대립했고, ‘성장’과 ‘분배’가 대립했다. 한 쪽은 박정희를 찬양하기 바빴고, 한 쪽은 박정희를 독재자라 비난하기 바빴다. 박정희 사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그래왔던 것이다.
박정희가 죽고, 여전히 그를 이어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고, 그 와중에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대중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3당 합당을 거치며 친일과 군부독재의 전력을 끌어안게된 보수정당에게 있어 ‘박정희’는 그들 스스로를 투영시키는 하나의 강력한 기표였고, ‘反박정희’의 기치를 내걸었던 김대중 역시 (상대적인)진보정당에게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었다. 강성이었던 노무현 역시 그의 유지를 이어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떠했나. 71년 성탄,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그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의 영구집권 기도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고, 그 후로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 아래 민주화 인사들을 끌어안고 보호해준 이들은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의 한국 천주교였다.
박정희 前 대통령 사후 30년.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前 대통령, 김대중 前 대통령(서거 순으로) 모두 ‘박정희 시대’의 거목들이었고,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박정희의 그늘을 지고 살아가야 했다. 박정희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에 가져온 빛과 어둠이 크고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같은 해에 돌아가셨고, 언제나 엇갈리던 박정희에 대한 양측의 평가도 날로 뜨거워져 요즈음이 가장 치열해 보인다. 역시,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징조가 아닐까 한다. 굼벵이도 죽기 전에 강렬하게 발악하고, 하루도 해뜨기 전의 새벽이 가장 춥다잖은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다시피, 박정희 前 대통령의 가장 큰 공(功)이라 한다면 산업화에 성공하여 피폐했던 국가경제를 발전궤도로 올려놓았다는 데에 있다. 과(過)라 한다면,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과(過)를 지적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비교적 단순명쾌하나 공(功)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조금 복잡하다. 그들도 ‘독재’라는 과오(過誤)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독재의 과오(過誤)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조건적인 추종자는 논의에서 배제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들은 당시 너무나 어려웠던 경제상황을 떠올리며 ‘산업화’라는 공(功)을 더 우선시 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먹고 사는 것이 일단 우선 아니냐’라는 식이다. 실제로도 박정희가 처음 권력을 장악했던 당시는 독재해서 사람 죽이나, 길바닥에서 굶어죽나 이래저래 죽는 사람 수는 같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이 편이 듣기에는 그럴싸하다. 그래서 선전하기도 쉽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박정희 신화’가 몹시 불편하다. 박정희의 모든 공(功)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반복에 의한 학습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산업화를 이룩했던 당시의 리더가 박정희였기 때문에 그의 리더쉽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중 대부분은 ‘반드시 독재를 해야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라거나, ‘박정희가 아닌 다른 리더가 있었다면 산업화에 실패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당시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박정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물론 그의 공이 적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실패했다’라고 말할 만큼 박정희의 존재 자체가 산업화의 1등 공신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지정학적, 국제관계학적 위치를 볼 때. 한국 산업화의 일등 공신은 서방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블러드 달러다. 젊은이들이 광산노동자, 간호사로 팔려나가고 고엽제 피해자, 상이용사에 대한 보상과 예우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을 타국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내세워 차관받은 외화, 문자 그대로 블러드 달러Blood Dollar.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러한 플랜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 지도자의 리더쉽’을 언급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한국만큼이나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나라가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곤 한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어 미안하지만 한반도처럼 전쟁을 겪어 심각하게 기반시설이 손상된 사례는 2차 대전 이후의 서독을 생각해보면 된다. 장벽을 경계로 둘로 나뉘어진 독일은 당시 전 세계적 관심사가 쏠려있던 체제경쟁의 실험무대였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질 수 없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은 서독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었고, 서독은 곧 ‘라임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수 년 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휴전과정에서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다. ‘한강의 기적’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알고 있으니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남한경제가 북한경제를 추월한 것은 80년대 초반이나 되어서의 이야기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1. 미국과 서방세계의 달러 지원
2. 미국, 일본 인접 및 동맹국의 거대한 수출시장
3. 일제시대 때 확충된 기반시설
(이에 대한 논란은 박정희 난상 토론에서의 진중권 발언을 참고할 만하다.
‘일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기반시설을 확충해줬다는 이유로 일제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의 논리로 박정희를 정당화할 수 없다’)
4. 박정희 前 대통령의 치정
5. 타 후진국 대비 높은 교육수준.
(다른 것들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다섯가지 중에 어떤 것이 가장 기여도가 높고, 떨어지는지 가늠하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을 아프리카 구석의 어느 나라에 데려다 놓으면 죽었다 깨나도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공(功)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독재’를 덮어줄 만큼 그의 치정이 대단했는가, 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의 공(功)이 검증이 되지 않은 불확실한 무엇이라면 박정희 前 대통령에게 남는 것은 과(過)가 더 클 것이다. 그의 과(過)는 너무나 크고 또, ‘확실’하기 때문이다. 나의 지론은 그렇다.
유시민은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가 이 세상 그 어떤 고귀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문장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자신의 마음을 울린다고 저서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아는 것이 일천한 나일지라도, 감수성은 좀 있는 편이라 그의 말에 백 분 공감한다.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
-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
모든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따금씩 박정희 前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대하여 옹호하는 사람들을 보면 섬뜩해질 때가 있다. 굶어죽으나 고문당해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라며. 말이야 쉽다. 그러나 죄없이 다치고 죽어나간 사람이 내 가족, 내 친구라면 결코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적자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더라도 다수 개체의 위락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이 되어버려서는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잖은가.
나처럼 어린 사람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눈을 희번득 거리면서 덤벼드는 어른들이 있다. 대게는 “너희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박정희의 리더쉽을 받아들인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 했던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너희 같은 어린 아이들이 그 시절을 평가한다는 것은 건방지다.”라는 식이다. 나는 이런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어른다운 어른이 따로 있고, 청년다운 청년이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원래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는 사람들일수록 동시대에 대한 가치판단에 둔감한 법이다. 시대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더욱 화려한 프로파간다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희끄무리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그게 역사다. 나는 독일이라는 나라를 참 좋아하는데, 이 나라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닮아있는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대한 가치판단이 둔감한 역사적 사례는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당시 사분오열되어있던 독일 좌파들을 영합하여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배신과 수권법(행정부에게 입법권한을 위임하는 법률)개정으로 인한 히틀러의 종신독재였다. 그리고 괴벨스를 앞세운 선전선동 앞에 전 독일 국민들은 나치에 열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오늘날의 독일국민들이 그 당시의 독일국민들을 평가하는 것을 두고 결코 건방지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박정희가 히틀러만큼이나 대역죄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다고 해서 평가하는 것이 건방지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단절된 것이 아니다. 예전의 사람들이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후대의 몫이 된다.
앞서 첫 문단에서 나는 ‘한 시대(박정희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한 바 있으나, 사실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다. 2009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잃어버려야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되뇌어 보고, 그들이 실천하면서 쌓아온 삶의 궤적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박정희와 김대중이라는 테제-안티테제가 한국사회를 뒤흔들던 지난 30년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끝이 났다. 어쩌면 모 일간지 기사처럼 평생의 숙적이던 그들이 ‘수고하시었소-’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희 사후 30년이 ‘박정희 시대’다면, 우리 세대에는 우리들의 시대를 열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2009년 이후에는 과연 어떤 시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짐작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 그토록 처절하게 싸웠던 김대중이 그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자신의 뜻을 이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 있었다. 구 시대의 막내이기보다 새 시대의 장자이고 싶다고 외치다가 홀로 죽어간 한 남자를 우리는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끝이 났지만 아직까지도 잔존하고 있는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의 딸도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버젓이 영위하고 있으니까. 새 시대로의 이행을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끝으로, 덧붙이건대, 박정희를 찬양하는 이들이여.
박정희 前 대통령은 쏟아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다. 박정희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당신들이 굳게 믿는 그 공적(功績)만큼이나 여유롭게 감내할 수는 없단 말인가. 그런 비판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폭압과 독재 아래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은 누구에게 위로받는단 말인가.
이런관점에서도 볼 수 있구나 하는 마음에 퍼왔습니다.
P.S : 꼭 이런글 올리면 댓글로 폭주하시는 몇몇 비인증분들이 계시는 관계로
원글은 링크하지 않습니다.
토론을 위한 댓글 폭주는 그냥 여기다가 해주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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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외면했다.
'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봐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 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선을 선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세훈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악을 조장하고 지금껏 선을 좌절시켜왔다.
지금까지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이렇듯 비판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악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 김대중의 '잠언집'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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